안정론(安定論)

내 친구는 부모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불화가 잦았고, 친구에게 기대가 큰 부모님에 대한 화가 많았었다.

그러한 순간속에서 내 친구는 불안정한 여자친구를 만났다.

몇번을 해어졌다가 사귀었다가를 반복했으며,

끝내 해어졌고, 내 친구 곁에 정말 많은 문제들이 생기어 났다.

내 친구는 그 많은 문제들을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 초월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내 친구의 마음 깊은 심연속에 자리잡고 있는 안정을 갈구하는 마음은 점점 커지어 갔으며,

그 결과 안좋은 친구들을 만나면서 스스로 타락의 길을 밟아갔다.

언젠간 그는 그 타락의 심연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 속에서 소비한 쓸모없는 비용들의 크기는 너무나도 클 것이다.

나는 내 친구가 너무 안쓰럽다. 그치만 나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또 다른 내 친구는 나와 정말 친구였으며,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를 사랑의 마음으로 놓아줬다. (나쁘게 본다면 나는 그녀를 버리었다. 나는 정말 나쁘고, 타락하며, 이익을 좇는 미개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큰 시련이 닥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녀에게는 정말 일생에서 가장 큰 시련이었을 것이며, 세상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런 시련이 닥친 후 그녀는 점차 안정될 존재를 좇았다.

그 결과 그녀주위로 불안정한 존재가 득실거리기 시작했으며, 그녀에게 가장 불안정한 존재가 안착했다.

그 불안정한 존재는 그녀를 점차 타락의 길로 인도했으며, 너무 착하디 착한 그녀는 그 타락의 길을 무엇에 홀린듯이 들어갔다.

몇달뒤 들려오는 소식에는 그녀는 타락의 길을 벗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심 정말 기뻤다. 왜냐면 나는 그녀를 매몰차게 버리었기에 나는 그녀를 위해서 아무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정말 쓸모없고, 배신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치만, 그녀가 타락의 길을 벗어났다고 해도 그녀 주위에는 불안정한 존재들이 득실거리었다.

아직도 그 타락의 존재들은 존속하고 있으며, 그녀는 그들을 이젠 상대하지 않고 있다.

나는 이러한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내 친구를 위해 이 글을 바친다.

나에게 고난과 시련이 봉착했던 시기가 있다.

그때 나는 안정을 좇으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었고,

끝내 그녀에게 너무 해가 되고, 짐이 된 것 같아 그녀를 놓아줬다.

놓아줬다는 것은 나의 생각일뿐, 그녀는 나를 원망할 것이다.

장장 3년의 시간을 하루아침에 버리었으니 나란 존재는 참으로 타락한 자이다.

그녀 없이 변질자로서 일생을 살아가면서 드디어 변질에 늪에 벗어난 듯하다.

그녀를 다시 봐도 괜찮을 까.

우리 인간은 안정된 것(안정체)을 좇는다.

우리는 힘들때 나의 힘듦을 잠시 기댈 안정체를 찾길 원한다.

그 찾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판단력은 흐려지며, 나에게 이득되지 않고 나에게 해가 되는 것 이여도 내가 무척 힘들때는 그것이 나에게 불필요한 존재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수용(만나다)하게 된다.

즉, 불안정체(불안정한 것)이여도 우리는 우리가 정말 힘든 순간에는 그것이 불안정하더라도 그저 수용(만나다)하게 된다.

수용을 하고 나서는 우리는 악한(타락한, 검은) 심연속으로 빠지며, 우리는 점차 변질되게 된다(수용 즉시 우리는 변질자가 되진 않는다. 수용 후 우린 점차 변질자가 되어간다.).

그치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심연속으로 빠지는 줄 인식하지 못하며, 우리가 변질되는 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수용이 지속된다면(안정체로 위장한 불안정체와 만남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완전히 심연속으로 가라앉으며, 우리는 완전히 변질되어 원래의 우리의 본 모습이 아닌 다른 변질된 모습이 되어진 변질자로 변해진다.

완전히 변질이 되게 된다면 우리의 힘듦은 더더욱 커지게 되며, 불안정체의 도움 없이 스스로 더 깊은 악(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힘듦이 지속되게 된다면 우리는 그제야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가 현재 변질되어 졌고, 이 상황(악의 길)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우리가 스스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지각할때는 이미 늦었다.

우리는 그 순간을 빨리 벗어나려고 애쓸 것이다.

벗어나야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불안정체(해악이 되는 것) 속에 있는 동안 우리가 잃은 것은 너무나도 많으며, 우리 옆에 바뀐 것은 너무나도 많을 것이다(안좋은 쪽으로).

그 악한 깊은 심연에서 벗어났다고 다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잃은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며, 우린 이미 변질자가 되어졌다는 것이다.

우린 그 상황을 벗어날 수는 있다. 그치만 우린 변질되기 전으로 완전히는 되돌아 갈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변질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그치만 우리 인간은 완전한 것을 좇는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안정된 존재를 좇는다.

그것은 우리가 상승하도록 도우며, 우리 앞에, 우리 곁에 장애물이 없도록 하며, 우리가 끝없이 상승하도록 돕는 존재이다.

완전한 것은 불완전한 것으로 부터 가려지며,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치만 우린 쉽게실이 불완전한 것을 좇지 말아야 하며, 우린 완전한 것을 좇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우린 완전체 속에서만 안정을 누리기(올바른 삶을 살기) 때문이다.


구 안정론

우리 인간은 안정된 것(안정체)을 좇는다.

우리는 힘들때 나의 힘듦을 잠시 기댈 동반자 같은 안정체를 찾길 원한다.

그 찾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판단력은 흐려지며, 나에게 이득되지 않고 나에게 해가 되는 사람이여도 내가 무척 힘들때는 그들이 나에게 불필요한 존재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수용하게 된다.

즉, 불안정한 사람이여도 우리는 우리가 정말 힘든 순간에는 그들이 불안정하더라도 수용하게 된다.

수용을 하고 나서는 우리는 악한 심연속으로 빠지며, 우리는 점차 변질되게 된다.

그치만 우리는 우리가 심연속으로 빠지는 줄 인식하지 못하며, 우리가 변질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수용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완전히 심연속으로 가라앉으며, 완전히 변질되어 원래의 우리의 본 모습이 아닌 다른 변질된 모습이 되어진 변질자로 변해진다.

완전히 변질이 되게 된다면 우리의 힘듦은 더더욱 커지게 되며, 스스로 타락하게 된다.

힘듦이 지속되게 된다면 우리는 그제야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가 현재 변질되어 졌고,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우리가 스스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지각할때는 이미 늦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순간을 빨리 벗어나려고 애쓸 것이다.

벗어나야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해악이 되는 사람속에 있는 동안 우리가 잃은 것은 너무나도 많으며, 우리 옆에 바뀐 것은 너무나도 많을 것이다.

그 악한 깊은 심연에서 벗어났다고 다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잃은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며, 우린 이미 변질자이라는 것이다.

우린 그 상황을 벗어날 수는 있다. 그치만 우린 변질되기 전으로 완전히는 되돌아 갈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변질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그치만 우리 인간은 완전한 것을 좇는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안정된 존재를 좇는다.

그것은 우리가 상승하도록 도우며, 우리 앞에, 우리 곁에 장애물이 없도록 하며, 우리가 끝없이 상승하도록 돕는 존재이다.

만약 당신 곁에 그러한 존재가 있다면 절대로 배타하지 말아야 하며, 정말 소중하고 존중히 그들을 대해야 한다.

그들이 당신에게 전부일 정도로.